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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들의 조직 개편 소식에서 최근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평탄화(Flattening)'입니다. 아마존은 2024년 관리자 대비 실무자 비율을 15% 이상 높이라는 지침을 내렸고, 메타와 바이엘 등도 관리 계층 축소를 진행하면서 이 흐름에는 'Great Flattening'이라는 이름까지 붙었습니다. 실제로 2023년 미국 전체 해고 인원의 3분의 1이 중간관리자였다는 분석이 있고(출처: Bloomberg · Live Data Technologies), Gartner는 2026년까지 조직의 20%가 AI를 활용해 계층 구조를 평탄화하면서 현재 중간관리 직위의 절반 이상을 없앨 것으로 전망했습니다(출처: Gartner, 2024).
국내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방향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조직이 중간관리자를 줄이기 전에, 구성원들이 먼저 그 자리를 피하고 있습니다. 2030 직장인 세 명 중 한 명(32.5%)은 중간관리직을 맡고 싶지 않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는 업무량 증가와 성과 책임의 부담이 꼽혔습니다(출처: 대학내일20대연구소, 2025). 흔히 '리더포비아'라 불리는 이 현상은, 중간관리자라는 자리가 조직에게나 개인에게나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이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기 전에, 되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정리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중간관리자라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들에게 부여되어 온 '역할'인가.
중간관리자가 감원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이들이 수행해 온 역할에 있습니다. McKinsey의 분석에 따르면 관리자가 쓰는 시간의 절반 이상은 행정 업무나 실무 처리처럼 '관리라고 보기 어려운 일'에 쓰이고 있습니다(출처: McKinsey, 2025). 현장의 진행 상황을 취합해 위로 보고하고, 위의 지시를 아래로 전달하고, 일정과 리소스를 조율하는 일. 조직 계층 구조가 만들어 낸 이 정보 중개의 역할은, 공교롭게도 AI가 가장 잘 흡수하는 업무이기도 합니다.
시장은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Coinbase는 감원 과정에서 실무를 하지 않는 '순수 관리자(pure manager)' 직위를 없애며 모든 리더는 강한 실무자여야 한다고 선언했고, Block과 Snap도 관리 전담 계층을 줄이고 실무를 겸하는 플레이어-코치 구조로 재편했습니다(출처: Ramp Leading Indicators, 2026). 이 사례들이 보내는 신호는 분명합니다. '관리라는 역할'만으로 정의된 자리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역할의 소멸을 사람의 소멸로 읽는 순간, 조직은 가장 값비싼 실수를 하게 됩니다.
AI가 흡수하는 일과 사람에게 남는 일을 가르는 선을 들여다보면, 이 실수의 정체가 보입니다. 데이터 처리와 패턴 인식, 예측, 정해진 워크플로의 실행은 AI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반면 경영진의 전략을 현장이 실행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 데이터가 현장의 맥락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는 일, 계획과 실행 사이의 어긋남을 감지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으로 남습니다(출처: Fast Company, 2026). 이 목록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모두 그 조직에서 오래 일하며 쌓은 경험, 판단기준, 그리고 도메인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산을 조직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계층이 바로 중간관리자입니다. 어떤 데이터가 어떤 사정 때문에 그렇게 기록되었는지, 어떤 고객이 어떤 말을 하면 실제로는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문제가 어디서 반복되는지. 이런 맥락은 시스템 어디에도 데이터로 존재하지 않지만, AI의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정확히 이 부분입니다. CEO의 56%가 AI로부터 유의미한 매출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답한 조사 결과는(출처: PwC 글로벌 CEO 서베이, 2026),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기술에 맥락과 판단기준을 공급해 줄 사람의 부재를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험과 도메인 지식은 AI가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조직 밖에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자산입니다.
관점을 이렇게 바꾸면, AI는 중간관리자의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오랜 부담을 덜어 줄 수단이 됩니다. 지금까지 중간관리자의 문제의식은 기획서를 쓰고, 보고를 올리고, 인력을 확보하는 '역할'의 통로를 거쳐야만 실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판단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를 현실화하는 작업의 상당 부분을 AI에 맡길 수 있습니다. 경험과 문제의식이 실행의 병목이 아니라 실행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Microsoft는 이런 조직의 모습을 구성원 각자가 AI 에이전트를 부리는 '에이전트 보스(agent boss)'가 되고, 고정된 조직도(org chart) 대신 성과 중심으로 사람과 AI를 결합하는 워크 차트(work chart)로 일하는 조직으로 그립니다(출처: Microsoft Work Trend Index, 2025). 이 구조에서 AI가 더 풍부한 맥락 데이터를 바탕으로 일상적 판단을 보조하게 되면, 취합하고 전달하고 조율하는 관리자의 역할 부담은 오히려 줄어듭니다. 그 줄어든 자리에 남는 것이 바로, 축적된 경험을 조직의 실행력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물론 재설계 없이 계층만 걷어낸 조직들은 이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관리자 한 명이 맡는 직속 인원은 평균 10.9명에서 12.1명으로 늘었고(출처: Gallup, 2025), 직장인의 37%는 방향을 잃었다고, 43%는 리더십의 정렬에 문제가 생겼다고 답했습니다(출처: Korn Ferry, 2025). 남은 관리자에게 더 넓은 스팬만 얹는 평탄화는 비용 절감이 아니라 실행력의 손실로 되돌아옵니다.
재설계의 출발점은 업무 흐름의 재정의입니다. 다단계 관리 역할이 존재해 온 이유는 일이 위계를 따라 흘렀기 때문입니다. 지시가 계층을 타고 내려가고 보고가 계층을 타고 올라가는 구조에서는, 단계마다 취합하고 전달하는 역할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층을 걷어내려면 그 전에 일이 흐르는 경로를 위계가 아니라 '직무'로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누가 어떤 직무를 수행하고 그 직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성과를 만드는지가 명확해질 때, 비로소 관리 계층 없이도 일이 흐를 수 있습니다. 사람과 AI 에이전트를 직무 단위로 결합하는 워크 차트 역시 이 바탕 위에서만 작동합니다.
직무 중심의 업무 흐름이 명확해지면 두 가지가 뒤따라야 합니다. 하나는 각 직무에 필요한 스킬과 역량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입니다. 권한의 하방 이양(출처: Fast Company, 2026)도, 소수 인원과 실무를 겸하는 플레이어-코치와 넓은 범위를 조율하는 코디네이터로의 스팬 이원화(출처: McKinsey, 2025)도, 어떤 직무에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 정의되어 있어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간관리자의 역할 개념 자체를 '관리 중심'에서 '코칭과 조직학습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취합과 전달, 통제의 부담을 AI에 덜어낸 이들에게 남는 소임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기준을 새로 유입되는 인력에게 이전하며 조직이 학습하는 속도를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이 재설계가 시급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이 역할을 원하지 않습니다. Z세대의 72%는 관리직 승진보다 개인의 성장을 택하겠다고 답했습니다(출처: Robert Walters, 2024). 지금 조직 안에 있는 중간관리자의 경험과 도메인 지식은, 시간이 갈수록 더 희소해지는 자산이라는 뜻입니다. AX 시대에 조직이 던져야 할 질문은 '관리자를 몇 명 줄일 것인가'가 아닙니다. '이들이 가진 경험을 어떻게 조직의 실행력으로 전환할 것인가'입니다. 정리해야 할 것은 역할이고, 지켜야 할 것은 사람입니다.